의식은 매우 특별한 존재다. 그 정체가 무엇이냐는 차치하고라도, 의식이 있기에 우리는 물질 세상에 대한 모델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의식 과학이 90년대에 태동한 이후 의식에 대해서 과학이 속 시원히 밝혀낸 것이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의식은 왜 그렇게 연구하기 힘든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의식 연구에서 20년 넘게 핫한 키워드로 회자되고 있는 The Hard Problem (의식의 난제)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2016년 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세돌 9단과 알파고와의 대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공상을 펼미쳐 인공지능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 거부감, 경외, 기대 등을 함께 느꼈다.

그중 내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해설자들의 반응이었다. 해설자들은 내내 알파고를 의인화하여, 실수를 했다느니, 당황했다느니 하는 표현을 썼다. 자아가 없는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사람들이 손쉽게 theory of mind (타인의 자아의 존재, 그리고 그것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능력)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물론 인격이 없는 객체에도 공감능력이 발휘되는 일은 흔하긴 하지만.

당시 많은 이들이 인공지능의 학습 능력이 계속 발전하다 보면 인격을 갖게 되어 인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공지능이 머잖아 의식을 가제기 될 것이라는 일부의 예상은 의식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기우라는 것이다.

알파고는 어디까지나 반도체를 기반으로 실행되는 프로그램이다. 즉 주어진 기호와 숫자를 이리저리 조작하고, 규칙에 맞게 연산을 수행하여 결과값을 뱉어내는 함수이다. 그러므로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이론적으로는 반도체가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도 알파고가 한 계산을 그대로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소개할 호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찰머스 (David Chalmers)에게 물었다면, 현상적 의식 (phenomenal consciousness)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이상, 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답했으리라. 우리가 느끼는 의식은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난제’ (the hard problem of consciousness)라는 말은 철학자 데이비드 찰머스가 1995년도 자신의 논문에서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의식 연구에는 두 가지 타입의 문제가 있는데,

1. (그나마) 쉬운 것들: 감각이 어떻게 분석되는가? 뇌 속에서 정보는 어떻게 처리되는가? 잠과 각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 물리적으로 해명 가능한 문제들. 각종 뇌기능에 대한 현재의 연구들

2. 어려운 것들: 왜, 혹은 어떻게 감각이나 현상적 경험이 발생하는가? 뇌의 활동이 어떻게 의식을 야기하는가?

찰머스에 따르면 “easy problem”은 뇌 기능의 메커니즘에 대한 것이어서 과학적 방법론으로 풀 수 있는, 실제로도 심리학 및 신경과학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인 반면, “hard problem”은 그런 뇌의 기능들과 나의 현상적 경험이 도대체 어떻게, 왜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모든 easy problem들을 다 풀어서 인류가 뇌의 모든 기능에 대해 이해한다고 해도 의식의 수수께끼는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이 hard problem 논증은 70~80년대에 있었던 인공지능 붐, 즉 모든 뇌기능을 계산으로 모델링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한 심리철학계의 반응으로 볼 수도 있다. 찰머스의 이 문제제기가 90년대 의식 연구에 붐을 일으킨 계기가 된 것 역시 사실이다. 이후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찰머스에 비판과 동조, 무시를 동시에 가했으나,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뚜렷한 결론이 나지 못했다.

이 문제가 바로 의식 연구의 정수임에는 분명하지만, 찰머스가 그 워딩으로 과학과 철학 사이에 너무 높은 벽을 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주관적 경험이 과학적으로 결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독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주 드는 예가 바로 ‘생명’의 정의이다. 18세기의 생물학자에게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 하는 질문이 바로 당시의 “the hard problem”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DNA, central dogma, 분자생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아무도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예전과 같은 신비와 경외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오늘 모른다고 해서 내일도 모를 거라는 주장은, 대개 역사적으로 틀린 것으로 결론난 경우가 많았으므로, 의식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알파고가 여러 차례 인간이 보기에도 놀라운 묘수를 두었듯, 현상적 경험이 없는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인간과 유사한 수준의 지적 기능을 수행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언젠가는 의식은 없지만 인간만큼 혹은 인간보다 더 잘 판단하고, 예측하고, 행동하는 로봇이 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의식이 없이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러한 논쟁은 추후 다시 살펴볼 “철학적 좀비” 논증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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