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it like to be a bat?”

박쥐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이 박쥐 논증은 위키백과에 개별 항목으로 등재되기도 한 의식에 관한 직관적이고 훌륭한 사고실험이다. 이 논증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의식의 주관성, 동물의식에 대한 시사점 등에 관해 알아보자.

미국의 청소년 공상과학 장편소설 애니모프(Animorphs)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이 만진 적이 있는 동물로 변신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이 소설의 백미는 변신에 대한 묘사인데, 날개가 돋거나, 껍데기가 생기거나, 입고 있던 옷만 남은 채 앤트맨처럼 작아지는 등 신체적 변화도 일어나지만, 변신 후에 자신의 인격과 그 동물의 본능이 공존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예를 들어 개는 발랄하고, 고양이는 무신경하며, 곤충은 외부자극에 극도로 예민한 것으로 그려진다. 침투 임무를 받고 주인공이 바퀴벌레로 변신하는데, 막상 변신하고 나니 여러 자극들에 날뛰는 바퀴벌레의 단순한 정신을 통제하느라 애를 먹는다. 이 묘사야말로 소설의 백미이다. 아마 작가도 동물행동학에 대한 사전조사를 꽤나 했을 것 같다.
우리는 개나 고양이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개는 우리보다 색에 대한 구별이 둔하지만, 어두운 곳에서의 물체 식별이나 움직임 포착에 매우 민감하다. 그래서 개는 모니터 화면이 1초에 60번 깜박거리는 것을 모두 구별해낼 수 있다. 후각이 훨씬 예민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고양이도 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소설 애니모프에서처럼 동물의 의식은 모두 인간 의식에서 특정 측면이 결여 혹은 향상된 것일 뿐인가? 이에 반론을 던진, 미국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의 1974년 논문 “What is like to be a bat?”은 현재까지 무려 8000회 이상 인용되며 당시 인지과학 및 심리철학계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1]
우리가 박쥐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물론 박쥐도 시각이 있지만[2], 동굴 생활을 위해 입에서 초음파를 발사하고 메아리(반향)를 귀로 받아들여 물체의 위치를 파악하는 기능을 진화시켰다. 이 기능을 반향정위(echolocation, 反響定位)라고 하는데, 이 기능은 고래나 돌고래도 가지고 있다. 이 능력은 박쥐의 경우 그 민감도가 벌레 하나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우수해서 인간의 시각과 유사한, 어두운 곳에서는 더 나은 기능을 한다. 그런데 도대체 소리로 물체의 위치를 “보는” 건 어떤 경험일까?

An organism has conscious mental states if and only if there is something that it is like to be that organism – something that it is like for the organism to be itself. ([1] 논문 본문)

네이글은 의식을 특정 유기체가 되어 겪는 주관적인 경험으로 정의한다. 우리는 인간의 주관적 경험이 보편적이라고 믿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 그러한 점에서 네이글은 박쥐의 예를 들며 의식의 주관성과 환원불가능성에 대해 논박한 것이다. 
박쥐의 모든 신경세포의 위치와 기능을 전부 알아낸다고 해서 박쥐가 되는 주관적 경험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박쥐에게 의식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 따라서 물리주의자(물리주의:세계에 물질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들이 이러한 사실을 겸허히 납득하고, 의식 문제를 재정의해야 한다고 네이글은 말했다.

Consciousness is what makes the mind-body problem really intractable.

Perhaps that is why current discussions of the problem give it little attention or get it obviously wrong.

의식이야말로 심신 문제를 풀 수 없게끔 한다.

심신문제에 대한 현재의 논의에서 의식이 거의 무시되거나 명백히 잘못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1] 논문 본문 첫 두 문장)

의식의 환원 불가능성이 중요한 이유는 현대의 의식 연구가 AI로 대두되는 환원주의 및 계산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처음 꽃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찰머스의 “Hard problem”도 결국 이러한 문제의 정교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네이글은 결국 불가지론에 도달하였지만, 사실 의식 연구에 있어서 환원적, 과학적 방법론을 쓰는 걸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고도 생각한다. 그것 외엔 뭘 할지 쉽게 떠올리기 어렵다. 명상과 같은 몇가지 대안이 제시되고는 있지만 뚜렷한 paradigm shift를 만들지는 못했다.

생각해 보면 누구나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의견을 갖고 있다. 천국과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면 이원론자dualist이고, 무신론자 혹은 과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물리주의자나 유물론자materialist가 되기 쉽다. 불교를 믿는다면 유심론자idealist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의식에 관심을 갖기 전까지 유물론자였다. 영혼은 미신이라고 굳게 믿었고, 뇌 속에 이다지도 큰 미스테리가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의식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의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삶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답할 수 있는 학문 분야가 또 있을까.

[1] Nagel, Thomas. “What is it like to be a bat?.” The philosophical review 83.4 (1974): 435-450.

[2] Shen, Yong-Yi, et al. “Parallel and convergent evolution of the dim-light vision gene RH1 in bats (Order: Chiroptera).” PLoS One 5.1 (2010): e8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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