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뇌의식의 우주> 번역을 마치고 오늘 역자후기를 탈고했다.
제럴드 에델만과 줄리오 토노니가 2000년에 쓴 이 책은 신경 다윈주의로 일컬어지는 에델만의 이론이 토노니의 IIT에 어떠한 영향을 줬는지, 둘이 어떻게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의식의 특성으로부터 거꾸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생물학적 시스템을 파고들어가는 발상의 전환이 너무도 흥미롭다.

열심히 쓴 글인지라… 블로그에도 역자후기 중 일부를 공개하려 한다.

역자후기 

세상에는 수많은 학문이 있다. 각 학문은 질문이라는 티끌이 무수히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별과 같다. 지구 표면 아래 외핵과 내핵이 있듯 각 학문에도 핵이 있다. 핵심에 가까운 질문일수록 더 뜨겁고본질적이며 난해하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철학의 핵심 질문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았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What can I know?)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What should I do?) 내가 소망해도 되는 것은 무엇인가?(What may I hope?)” 이 세 물음은 결국 단 하나의 질문으로 소급된다. “인간 정신, 즉 의식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자연과학은 물리 세계의 본질을 탐구한다. 가령 물리학은 물질이 무엇인가를, 화학은 물질이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생물학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그 핵심 질문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신경과학은 조금 다르다. 일견 신경과학은 뇌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신경과학은 모든 연구의 기저에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늘 인간 의식에 대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자연과학 분과들과 다르다. 감각, 기억, 의사결정 등의 고차 기능을 연구할 경우 이는 자명하다. 실제로 지난 수십년 간 교육학, 마케팅, 경제학, 미학 등 인간의 행동을 다루는 많은 분야는 신경과학의 발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상당한 진전을 거두었다. 고차 기능보다 작은 규모의 시스템, 가령 뉴런 세포막의 어느 단백질을 연구할지라도, 그 연구는 해당 단백질의 특성이 인간 정신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에 대한 함의를 담아낼 때 비로소 신경과학적으로 유의미하다. 이것이 신경과학이 생물학의 일부이면서도 생물학의 여타 하위 분과들과 차별화되며, 때로는 심리학(특히 인지심리학)과도 함께 묶이는 연유다. (사실 현대의 인지심리학은 신경과학과 완전히 융합되었다고 보아도 무관하다.) 요컨대 인간 정신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신경과학과 철학, 인문학은 접근 방식이 다를 뿐, 같은 핵을 공유하는 하나의 별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무색하게도 오늘날 철학과 신경과학은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특히 많은 철학자들은 신경과학적 방법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현대 신경과학 연구가 이루어지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생쥐나 선충 등의 모델 시스템에서 특정 기능과 관련된 세포나 회로를 찾는 것이며, 둘째는 인간을 대상으로 fMRI 등을 활용하여 뇌영상을 촬영하는 것이다. 전자는 실험 조건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지만(자연과학자들은 이것을 광적으로 좋아한다!), 인간과 해당 동물이 공유하는 단순한 뇌기능을 넘어 정서, 도덕성, 예술성, 사회성과 같은 인간 고유의 능력을 탐구하기는 아주 어렵다. 한편 후자는 고차원적인 정신 활동을 다룰 수 있지만, 해당 활동과 뇌혈류랑의 상관성을 간접적으로탐지할 뿐인데다가, 여러 명의 실험 결과에 대한 평균을 취하기 때문에 (인문학의 본질인) 개인별 맥락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뿐만 아니다. 설령 오랜 시간이 흘러 인류가 뇌의 물리적인 작동 원리를 완전히 이해했다 하더라도 과연 의식 그 자체의 주관성을 이해할 수 있을까? 세포덩어리에 불과한 뇌가 도대체 어떻게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인가? 건널 수 없는 간극(unbridgeable gap), 설명적 간극(explanatory gap), 의식의 난제(the hard problem of consciousness), 세계의 매듭(World Knot)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는 신경과학과 철학 사이의 이러한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도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몰두하고 있지만, 아직은 요원하다.

이 책의 저자 제럴드 에델만은 1929년생으로, 항체 단백질의 구조를 규명하고 생체의 면역 반응의 메커니즘을 밝힌 성과로 1972년 노벨상을 수상한 정통 자연과학자다. 1970년대 이후 에델만은 면역학적 사유를 신경과학에 적용하여 신경 다윈주의, 즉 신경집단 선택 이론을 세우기에 이른다. 에델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여 의식의 난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 그것은 바로 의식의 보편 속성을 먼저 정의하고, 그 속성을 가능케 하는 기저의 신경 과정을 찾는 것이었다. 이는 에델만 이전의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위대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정보의 경쟁과 통합을 의식의 주기능으로 보았던 에델만의 의식 이론은 많은 신경물리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지금까지도 여러 의식 상태에서 정보의 흐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또한, 에델만이 재유입이라 통칭한 신경집단 간의 양방향적 연결망이 고차적 뇌의 기능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광유전학(optogenetics)을 활용한 최근의 연구에 의해 지속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위와 같은 배경 지식을 감안하면 이 책이 지닌 가치가 더 확연히 다가올 것이다. 이 책에서 에델만은 단순히 신경생리학에 관한 논의에 그치지 않고, 자아, 언어, 문화, 문학, 예술 등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감히 다루기 꺼려하는, 하지만 분명히 의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문학의 주제들에 신경과학이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지에 관해서 과감하게 통찰을 펼쳐 내보인다. 이로써 그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을 건너는 다리의 첫 주춧돌을 놓은 것이다. 그의 사유가 원서 출간 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비록 에델만은 2014년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학문적 유산은 이 책의 공저자인 줄리오 토노니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수면 연구자인 토노니는 1990년대 초부터 10여년 간 에델만과 협업하였고, 2004년에는 통합 정보 이론(integrated information theory)이라는 자신만의 이론 체계를 구축하였다. 두 차례의 판올림을 거쳐 이른바 ‘IIT 3.0’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에 이르는 토노니의 이론은, 의식의 다섯 가지 자명한 속성(토노니는 이를 공리라 부른다)에서 출발하여 이것이 물리계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논한다는 점에서 이 책과 정확히 같은 방법론을 따른다. 토노니는 한발 더 나아가 특정 계의 의식 수준을 예측할 수 있는 파이(Φ)라는 함수를 정의하기도 했다(후략)


가능하면 <뇌의식의 우주> 책을 해설하는 글도 찬찬히 올려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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